▲ 운무.

지난 13일, 지리산의 아침 이슬비는 나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새벽운무의 풍경이 참 아름답다.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7월이다. 초록의 잎은 비에 젖어 반짝이는 질감을 뽐낸다.

새는 정말 예쁘다. 새들은 지지배배 다양한 소리를 낸다. 하루에 몇 번 넘게 암∙수가 정답게 사랑을 나누고 콧노래를 불러댄다.

이게 끝이 아니다. 구애할 때도 소리를 내는데 우리가 듣는 소리와 새가 듣는 소리는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 야생화.

대개의 새는 외도를 모르고 평생 일부일처를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조릿대 스치는 바람소리에 공허함이 밀려든다.

이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길섶은 BBC 자연 다큐멘터리 명작을 보는 듯하다.

천왕샘 나무사다리 지점이다. 정상까지 5여분 거리다. 평소와 다름없이 등산객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더위에 지쳐갈 무렵, 정상의 표지석이 나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쉬었다 가라고 부른다. 산들바람 덕분에 몸도 가뿐해졌다.

▲ 중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정상.

필자는 70년 초 지리산 등산에 입문해 어느새 50여 년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묵묵히 인내의 시간을 버텨왔다. 500회는 채워야지? 생각처럼 쉽지가 않을 것 같다.

우리 인생은 눈에 보이는 완성을 이룰 기회가 흔하지 않다.

근육은 머리카락만큼 가늘고 긴 근섬유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근섬유가 모여 근조직을 이루고, 이 조직이 합쳐져 근육을 이룬다고 한다.

▲ 이정표.

인체의 근육은 약 650개, 대부분은 뼈와 맞닿은 골격근이다. 근육이 제 기능을 잃으면 몸을 움직이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표지석’에 찍힌 손도장의 숫자를 하나, 둘, 셋 기록했다. 사진을 스캔 받아 인쇄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그날 걸어야 하는 거리를 절대 뒤로 미루지 않는다.

사진사를 자칭하는 등산객은 초점이 흔들려도 감이 오면 거침없이 찰칵∙∙∙ 갈고 닦아 온 기술을 선보였다.

▲ 표지석에 선 필자.

아름다운 것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자칭 사진사가 찍어 준 휴대폰의 ‘표지석인증샷’을 검색하고 웃는 그 얼굴에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필자는 인적이 드문 중봉(中峰1874ｍ)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리산능선에 환상의 운해가 펼쳐진다. 중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풍경은 해학적이다.

골짜기 사이사이를 오가는 자유분방한 운무도 다양한 색깔이 있음을 선보인다. 공존하는 공간이 나의 오감을 요동치게 한다.

▲ 고사목과 운무.

야생화 향기가 감미롭다. 은은한 향기가 고요를 타고 내게 잔잔하게 다가왔다. 가만히 앉아 그 향기에 취했다. 흐뭇했다.

이 텅 빈 여백이 주는 즐거움을 산새와 나는 공유했다. 잔잔한 바람이 부는 날 새들의 합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은 비우지를 못해 늘 부딪치는 파열음이 넘친다. 내가 나를 비우지 못하므로 너희(산새) 소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정상에 선 여성 등산객.     ▲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감상하고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을 봐라. 그 간격은 나무가 스스로 비운 자리다. 그 간격이 있어 나무는 함께 성장하고 숲을 이룬다.

둥근 바위에서 잡다한 것들을 대충 밀고 점심을 먹는데 큰 배낭을 등에 업고 환하게 웃는 30대 여인이 다가와 사진을 요청한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여인은 M종목 출전을 앞두고 몸을 푸는 정도로 생각하고 대원사 쪽으로∙∙∙ 나는 천왕봉으로 다시 돌아갔다.

▲ 인증샷을 남기고 있는 등산객.

이 외에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는 직녀∼견우성 등 다양한 형태도 지금은 빈 둥지를 보는 것처럼∙∙∙ 공허하다.

다시 하늘이 반짝 열리니 바라보는 계곡은 웅장하다. 그런데 강풍 및 강우, 강설로 인해 수목이 쓰러진 지역이 눈에 보인다.

고사목은 새와 곤충들에게는 좋은 거주지를 제공하며 삶을 이어가는 생물에게는 질 좋은 저장고 역할을 한다.

필자를 품어주는 산, 산이 주는 교훈은 공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