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을 오르는 등산객

지리산은 고구마를 삶아 광주리에 담아 낸 넉넉한 어머니상이다.

지난 19일 오전 6시께 지리산 중산리 통천길∼법계사∼꼭지점(1915ｍ)∼중봉 등 오밀조밀 깔린 납작 돌과 흙을 밟고 12시간가량 홀로 걸었다.

어제 내린 비를 맞아서 한층 푸릇푸릇해진 나뭇잎들이 반공중에 날개를 펴고 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도 들려온다.

숲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계곡물소리, 새들의 즐거운 합창소리, 다람쥐가 찾아와 인사하고 야생화들도 눈짓하니 나도 몰래 콧노래가 나온다.

또 산에는 기암괴석이 곳곳에 우뚝 솟아 산을 더 경이롭게 만든다.

* 오늘은 석가탄신일, 법계사에 도착한다.

인연은 불가(佛家)에서 유래된 단어다. 모든 것이 생기고 소멸하는 데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서, 우주 만물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을 인(因)이라고 하며, 인을 일으키는 여러 간접적인 조건을 연(緣)이라 구별한다.

한번 엉킨 실은 정말 풀기 어렵다. 그래서 시작을 잘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끝까지 잘 맺는가도 매우 중요하다.필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 정상(1915ｍ)에 올랐다.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공기는 어린아이 웃음소리처럼 티 없이 맑다. “할매형상”에 예를 갖추고 마음속 소원 몇 가지를 내려놓는다. 얘기를 다 들어 주실 것 같다.

▲ 야생화.

잠시 후 다도해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보려고 눈의 조리개로 초점을 맞춘다.

요즘 등산인구가 늘어나면서 산객들이 정상을 많이 찾는다. 정상에 도착한 산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표지석 앞면과 뒷면에서 인증샷...

코로나19로 인해 등산객들은 대부분 흰 마스크를 쓰고 정상에 도착한다.

흰 마스크 착용은 피부에 좋지 않다. 겨울 스키장에서 얼굴이 타는 원리와 동일한데, 강력한 자외선이 흰 마스크에 반사되어 마스크 주변 피부에 각종 질환을 일으키기 때문, 기미는 물론 지속적으로 빛이 반사되는 경우 경미한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한다.

중봉 숲속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수백 년 묵은 구상나무에서는 3배 이상 쏟아진다는 피톤치드의 향연!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쉬어 본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어 올라간 구상나무보다 정작 내 눈길을 끈 것은 뜻밖의 ‘못난이 구상나무’였다. 이 구상나무는 중간에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을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비틀어지고, 휘어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 필자.

구상나무는 수분이 적어서 잘 썩지 않고, 나이테 간격이 1mm 남짓으로 뒤틀리지 않게 버티는 힘도 좋다,

그래도 집 근처에 있다면 가까이서 늘 지켜보고 싶은 나무였다.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또 천왕봉 쪽으로 향한다.

걷는 동안 촉촉해진 흙, 수풀향기, 산 위로 이동하는 구름도 보고, 맑은 산소를 가슴에 넣었다.

가끔은 지인들과 어울려 산을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 산행은 혼자 간다. 짧게는 서너 시간부터 길게는 하루 종일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눈앞의 풍광에 집중하다 보면 머릿속이 맑게 씻기는 힐링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인생도 산을 오르내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르막 돌계단을 견뎌야 내리막이 있듯이 힘든 순간들을 인내하고 극복하면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