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사구리시

그리고 '비사리 구시'...

송광사의 승보전 옆에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크다란, 너무너무 크다란 통이 하나 전시되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송광사의 세 보물중 하나인 '비사리구시' 죠.

이 크다란, 쌀 7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고, 그 밥으로 4000명을 먹일 수 있다고 하는 밥통 인겁니다.

당연히 만져보고 들여다 보았죠.

그러나 그 크다란 구시속에 담긴건 그냥 지나가는 바람 이었습니다.

텅 빈 통 안에 흘러간 나이만큼 많은 세월만 담겨있었죠. 밥도 아니고, 쌀도 아니고 닳고 닳아 구멍난 장구한 시간만 말입니다.

'비사리구시'는 크다란 싸리 나무의 속을파서 만든 나무 통을 말합니다.

'비사리'는 싸리나무의 껍질을 말하는 것이고, '구시'란 남도에서 사용하는 방언으로 주로 가축의 먹이통을 일컫는 '구유'라는 말 입니다.

ㅎ... 사람이 먹는 밥 그릇을 그렇게 구시라고 하지는 않지요. 그냥 구시 모습의 생김새로 만들어졌다는 거겠지요. 구시라니... ㅋㅋ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1724년, 조선 20대 임금 경종이 죽고 영조가 임금으로 등극을 하던 해... 전라도 남원 동동면 세전골에 있던 커다란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인해 쓰러졌죠. 나무가 너무나 크고 아까워 몇 토막으로 잘라서 요긴하게 쓸려고 했습니다. 제일 큰 밑 부분을 곡성의 도림사에서 가져가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다시 구례 화엄사로 옮기겠다고 인원을 늘려 시도 하였으나 역시 움직이지 않았죠. 하는 수 없이 순천 송광사로 운반하겠다고 하니 비로소 땅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참, 무슨 나무에 신령이 깃든건지...ㅎ

뭐 어쨌던 예사 나무가 아닌거죠.

그렇게 비싸리 나무의 가장 큰 밑둥은 송광사에, 중간은 화엄사에

보내져 구시가 되어 현재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맨 윗 부분은 도림사로 보내져 보관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6, 25때 불에 타 버렸죠.

어쨌던 이렇게 만들어진 이 구시는 영조 이후에 나라에서 제사를 모실 때 일반 백성들과 손님을 위한 밥을 담았던 통으로 쓰였습니다.

당시의 송광사 모습이 보이는듯 합니다.

모처럼 열리는 승보사찰 송광사의 국가적행사에는 수많은 중생들과 백성들도 모였을 겁니다.

행사의 염불은 높은 사람들과 스님들이 하면 됐을것이고, 배고픈

백성들은 잿밥에만 신경이 쓰였겠죠.

자 드디어 행사는 끝이났고 밥을 먹을 순서가 됩니다.

크다란 비사리구시에 7가마의 쌀밥이 담겨져 대웅보전앞 큰 마당에 놓였지요. 퍼내고 또 퍼내고... 끝없이 늘어선 동서남북, 두줄, 세줄 사방팔방 늘어선 줄에는 사람마다 손에는 밥을 담을 바가지나 소쿠리, 숟가락이 들렸을 겁니다. ㅎㅎ... 부처님의 도력이 담긴 구시의 밥은 하루종일 퍼 내도 줄어 들지를 않는거죠. 비사리구시를 빙 둘러서서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며 숟가락을 빨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는듯 합니다.

배가 고프지만 조금만 지나고 차례가 되면 저 하얀 쌀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눈빛을 반짝이며 상기된 모습으로 미소까지 띤 아이들의 모습... 내 새끼, 내 부모에게 먹일 밥을 얻을려고 줄지어 합장하며 선 민초들의 모습... 한번이라도 흰 쌀밥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도록 하여주신 부처님께 감사해 하는, 당시의 송광사 모습이 보이는듯 합니다. 부처님의 가피로 가슴 넉넉한 자비로운 송광사의 모습이 말이죠...

비사리구시는 배곯은 백성들의 배를 불리게하는 정말 보물다운 보물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승보종찰(僧寶宗刹) 조계산 송광사(曹溪山 松廣寺) 7

그렇죠. '십(十)'과 '만(卍)'...

너무 큰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소쿠리엔 오병이어(五餠二魚)가 담겼듯이, 부처님의 쌀밥은 비사리구시에 담아서 중생들의 배고픔을 물리친거죠.

예수님의 성배가 황금이나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고급스런 잔이 아니었듯이, 부처님의 밥그릇도 화려한 본차이나의 자기 그릇이나 황금으로 만든 바라가 아니라 한낱 태풍에 넘어진 싸리나무로 만든 천하디 천한 구시같은 밥그릇 이었다는 말입니다.

ㅎㅎ... 머리 한번 흔들고 현실로 돌아 옵시다. ㅋ

그런데 이 비사리구시가 싸리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라는 주장도 있죠.

또, 비사리구시의 재료인 싸리나무는 빗자리를 만드는 싸리나무가 아닌 느티나무인데, 과거 스님들의 사리함을 주로 만들던 느티나무를 사리함 만드는 나무라는 뜻으로 '사리나무'로 부르던것이 싸리나무로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뭐... 그런거야 전문 감정의원에게 보이면 당장 밝혀질 것이니 그건 그냥 넘어 가겠습니다.

그런데 이 비사리구시에 재미난 전설이 전해 옵니다.

옛날 승주에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함께 화목하게 사시는 불심깊은 할머니가 있었죠. ㅎㅎ... 불심 깊은 할머니는 반나절 거리에 있는 송광사를 자주 찾았는데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승에 갔더니 염라대왕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음~ 너희들은 송광사에 가본 적이 있느냐? 거기에 있는 비사리구시를 보았느냐? 그 크기가 얼마나 되더냐? 그걸 아는 사람은 인간 세상으로 보내 다시 살게하여 주겠다."

염라대왕의 이 말을 들은 많은 망자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자기가 본 크기를 맞다고 떠들어 댔죠.

하지만 할머니는 그 크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할머니는 송광사를 자주 갔던 일을 설명하고, 지눌대사의 기일에도 빠짐없이 갔었지만 비사리구시의 크기만은 잘 모르겠노라고 답을 했습니다. ㅎㅎ... 염라대왕은 할머니의 참된 마음을 높이샀죠.

그래서 다시 살아난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가서 자로 재어보고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질긴 실로 폭과 길이와 높이를 재어서 빨간 주머니에 넣어서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오래 살고싶은 사람들은 오늘날도 송광사에 와서 그 크기를 실로 재어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습이 있다고 하네요. ㅎ... 아~ 나도 재어 왔어야 하는데... 꼭 다시한번 송광사를 다녀와야 겠습니다.

... 바람 세차게 부는 날

일주문 앞에 커다란 나무 하나 쓰러졌다.

장작불 하기가 아깝다 하여

스님 몇이 도끼와 톱을 들고 달려들어 구시를 만들었는데

잔칫날에 쓴다는 밥그릇이다.

쌀로 만든 저 고봉의 흰밥이

부처의 사리였으니, 모락모락 김 오르는 밥 담아놓은 저 구시가 사리함 아니겠는가.

다비로 방금 지어낸 밥이란, 생의 숨구멍에서 얻어낸 핏방울 아닌가 해서, 저 밥그릇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산 아래 노숙의 곁에 던져놓고, 뜨거운 불 같은 말씀을 고봉으로 담아서 드리겠다.

저 가난이 남김없이 드신 다음에는

죽은 나무에 이제 막 꽃 피듯이

혀로 깨끗이 씻어놓겠다.

'김종제' 시인의 '비사리구시'라는 제목의 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