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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 인물, 서비 최우순 선생
구성옥 기자  |  k003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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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09  11: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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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은 지역민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다 일본왕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자결 순국하신 애국지사 서비 최우순(1832~1911)선생을 6월의 고성인물로 선정했다.

서비 최우순 선생은 효자 이형 필홍의 손자이고 최백진의 아들로서 순조 임진년 1832년 6월 22일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에서 태어나 유학자로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 서비 최우순 선생의 순의비

일제침략 후 민생이 날로 황폐해지고 흉년이 계속되자 굶주린 백성들에게 조곡까지 나누어 주는 구혈사업을 수년간 계속하여 3천 석이나 되는 재산이 줄어들었지만 이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나라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에 대한 결사반대를 외치던 때 선생은 서부경남 일대의 유림지사를 규합하여 자희산록에서 창검술을 익히고 훈련을 쌓은 뒤 의병을 이끌고 다른 지방의 의병들과 합류하고자 고성읍을 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1910년 8월 일본의 강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이 있는 동쪽이 싫어 ‘지금부터 서쪽에서 기거하며 서쪽에서 침식을 하고 서쪽에서 늙어 죽을 것이다’라는 글을 쓰고 서쪽 사립문을 뜻하는 서비로 자호했다.

한국민의 반발을 두려워한 일본은 국내의 명망이 높으며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인사들을 선발하여 소위 일본왕의 은사금으로 회유책을 꾀하였다.

선생은 전국 27인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고 1911년 3월 18일 일본헌병대 고성분견대장이 일본군 선무대와 함께 기마대원 15명을 이끌고 선생의 집으로 찾아와 소위 은사금을 내어 놓으며 의병을 일으키지 말라고 강요하였으나 선생은 대의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부하자 일본헌병은 밤이 되어도 돈을 받지 않으면 강제로 연행하겠다고 했다.

선생은 ‘날이 밝으면 내 발로 걸어가겠다’며 거짓으로 말하고 그날 자정 의관을 단정히 차려입고 뜰에 앉아 북방재배를 하고 조국광복을 염원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

이날이 1911년 신해년 3월 19일 향년 80세 되는 날이다.

선생이 순절하시기 전에 "동방에는 왜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니 나의 후손들은 사릿문을 서방쪽으로 내라"는 유서를 남겼다.

   
▲ 서비정

선생의 순절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과 지사들이 선생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1924년 도곡산록에 사당을 건립, 서비정이라 이름짓고 해마다 향사를 모시고 있다.

또 1945년 해방 후 전국 유림과 고성군민이 선생의 숭의회를 조직하고 순열의 정신과 행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학동마을 입구에 서비 최우순 순의비를 건립했다.

1990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충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고성문화원은 선생이 태어난 하일면 학동마을 옛터에 표지석을 설치해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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