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 능선 그 자체가 수수한 안개꽃 다발.

겨울이 성큼 찾아왔다. 세상이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나의 뒷모습을 볼 수 없기에, 가끔 해를 등지고 서서 내 앞으로 길게 뻗은 그림자를 오래 지켜본다.

겨울이면 모든 바깥 활동이 힘들지만 산행은 더더욱 고행과 비슷해진다. 아무리 옷을 잘 갖춰 입었다고 하더라도 얼굴로 파고드는 찬바람을 모두 막지는 못한다.

지난 2일 오전. 낙엽이 떠난 자리에는 익숙한 새들만의 멜로디가 슬프게 퍼져 나간다. 칼바위지점을 지나면서 나보다 뒤처졌던 사람(5명)들이 모두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경쟁보다 자연과 보조를 맞춰 느리게 걷는 일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걸음이 빨라질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돌아본다. 천왕샘을 지나 가파른 나무 계단에서 계명대 AMP산악회원들을 만났다.

낯선 이에게 모처럼만에 ‘카메라렌즈로 베푼’ 배려가 여행자의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지리산 정상(1915ｍ)의 날씨 맑음, 360도 탁 트인 조망이 펼쳐진다. 예전처럼 표지석이 나오도록 ‘인증샷’을 찍으려고 하는 산객이 없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겨울에는 공기가 건조하고 깨끗해져 다른 계절에는 잘 보이지 않던 먼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고 평소 보이던 산은 더 가까이 느껴진다.

저 멀리 삼도봉(1,499ｍ). 영신봉(1,652ｍ). 반야봉(1,732ｍ) 등 백두대간음지능선의 ‘하얀 눈’ 그 자체가 수수한 안개꽃 다발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랑이 논과 밭 등 계곡을 옆에 끼고 있는 마을 모습도 보인다.

표지석을 옆에 끼고 이런 조망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이 계절의 장점이다.

한 해의 끄트머리이자 첫 토요일 오전, 지리산 정상 표지석에 이맛머리를 맞대서니 새로운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또다시 찾아올 그녀를 생각함은 어인 일인가. 사랑은 감춰지고 정이 앞서간다. 드는 자리는 낌새 없이 오는 등 마는 등 들어오지만 나는 자리는 기별도 없이 자취를 홀연 감추고 만다.

그러나 가치중립적인 용어일지라도 쓰이는 맥락과 배경에 따라 그 용어나 말에 확고한 가치 판단이 녹아든다.

2017년 남은 28일, 탁 트인 풍광에 찬바람 맞아도 지리산정상표지석을 360번째 안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